조회 : 3,771 | 2014-03-05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1)

1989년 몰타 회담으로 냉전 체제가 끝나면서 미소 공동의장에 의한 중동 평화회의가 가능해졌다. 아울러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아랍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현실주의로 급선회함으로써 90년대 중동의 외교지도는 전혀 새로운 판을 짜게 된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측 분쟁당사자가 얼굴을 마주 대했다. 사담 후세인의 진의와는 무관하게 이라크의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동 역내 문제의 핵심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감추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1991년 3월부터 10월까지 중동을 8차례 순방하면서 마드리드 회의의 3대 장벽인 교섭 방식,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참가 방식,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자결권 문제를 해결했고 회의의 중재자로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베이커 국무장관의 의욕적인 외교는 협상의 최종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데까지가 전부였다. 말을 물가로 데려올 수 있지만 강제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드리드 회의는 양측이 요구하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마드리드 회의와는 별도로 오슬로 협정으로 불리는 비밀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비밀 교섭을 통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합의가 도출된 데에는 국내외 정세가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협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들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PLO

PLO 지도부는 걸프 전쟁 중 이라크를 지지한 정치적 실수를 시급히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PLO가 이라크를 지지한 탓에 쿠웨이트 내 40만에 달했던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 사회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국외 추방과 이라크 협력자로 낙인 찍혀 체포되거나 살해당했다.

튀니지의 PLO 본부는 이라크로부터 받아오던 원조금도 전후 패전국이 된 이라크 자신의 코가 석자가 되자 끊어지고 쿠웨이트 내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으로부터 소득세 명목으로 5%를 받아오던 지원금도 못 받게 되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부터 이스라엘 내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직접 지휘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후세이니, 누세이베와 같은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 지도자들이 튀니지에 망명해 있는 PLO 지도부에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베이커 국무장관도 PLO와는 교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이들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 지도자들과 접촉을 시도함으로써 PLO는 자칫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표성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

지난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며 아랍세계에 대해 자신감에 차있던 이스라엘은 걸프 전쟁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치르며 국내에 ‘방위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이전까지의 전쟁은 전방과 후방의 분명한 구분이 있었고 전방에서 싸우는 군인과 달리 후방의 시민들은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걸프 전쟁이 진행되던 한 달 이상, 이라크에서 쏘아대는 스커드 미사일은 이스라엘 시민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2분 내에 방독면을 쓰고 방공호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 이스라엘 시민들은 국가 방위에 대해 전향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은 국토가 작아서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고 완충지대로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적 종심성’ 이론이 힘을 받았지만,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아무리 점령하고 있어도 날아오는 미사일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지 점령지를 반환해 주고 아랍국들과 전면적인 평화조약을 맺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은 것이다.

냉전 체제가 무너진 세계 정세도 팔레스타인과의 직접 협상을 위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냉전 시대에 이스라엘은 대(對) 소련 전략을 빌미 삼아 미국으로부터 방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스라엘의 전략은 차질을 빚었다. 오히려 걸프 전쟁을 치르며 미국은 이스라엘을 자제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고 이스라엘이 큰 짐이 됨을 느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2-300만 명의 소련 거주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이스라엘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주택건설을 위해 100억 달러의 자금을 세계상업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야 했다. 이 때 미국이 보증을 서는 조건으로 싼 이율의 융자를 받기로 했는데, 보증을 서는 조건으로 미국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평화협상에 응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점증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 무슬림 형제단에서 분리되어 나온 단체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평화교섭을 추진하는 PLO를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들은 PLO와 분명한 선을 긋고 과격한 테러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편에서도 튀니지로 이전한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는 PLO를 팔레스타인의 협상 파트너로 삼는 게 그나마 나은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오슬로 협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한 막다른 골목의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진 마드리드 회의와는 별도로 오슬로 협정으로 불린 비밀 교섭이 극적으로 타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PLO는 ‘잠정적인 자치에 대한 원칙 선언’에 조인함으로 세계를 다시 놀라게 한다. 그 직전 양측은 상호를 승인함으로써 오랜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슨 일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곳이 중동’이란 말이 있다. 1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테러조직 PLO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PLO의 아라파트 의장도 ‘평화교섭에서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겉으로 뱉는 허언과는 달리 양측이 처한 딜레마가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오슬로 협정의 실질적인 막후 역할은 노르웨이 응용사회학 연구소 소장인 텔리에 라이센이다. 그는 노르웨이 정부 의뢰로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아랍 사회 실태를 조사하던 중 워싱턴 공식 채널과는 별도의 사이드 채널이 필요함을 느끼고 이 비밀 교섭을 중재한 것이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가진 오슬로 협정의 최종 조인식에서 미국이 이 교섭의 배후에 있는 듯 행동했지만 실은 완전히 장외에 있었고 클린턴 정권의 센스 없는 외교가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류모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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