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206 | 2014-03-05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1차 중동전쟁(1)

1948 년 5월 15일은 유엔이 창설된 이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날이었다. 하루 전에 자랑스럽게 독립을 선포한 이스라엘은 이튿날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등 서쪽의 지중해를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아랍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귀환한 소수의 유대인들이 주변의 압도적인 아랍군에 밀려 지중해로 수장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 ’인것처럼 보였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조지 마샬은 이스라엘 외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당신 주변에 온통 아랍국가들이고 당 신의 등 뒤는 바다군요. 어떻게 이 공격을 버티어 내시겠습니까? 약간의 무기와 시민군이 있긴 하지만 아랍은 정규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잘 훈련 받았고 중장비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버틸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유엔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 로를 위로하며 뒷짐을 지고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 치며 ‘세계 평화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이 되겠다 ’는 그럴듯한 대의명제를 안고 출범한 유엔은 전쟁을 막기 위한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결국 허울뿐 인 기구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유대 인들은 유엔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절체 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이 때 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가히 ‘기적 ’이라 부르는각본없는전쟁 드라마가 씌어지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먼지만 자욱한 역사의 다락 에서 ‘다윗’의 방패와 ‘바르 코흐바 ’(132-135년 로마에 대항한 봉기를 주도한 유대 인 장군)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후 유대 인들이 유순하다는 유럽인들의 통념이 부 서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 았다. 수주 간의 총격전은 유대인의 승리 로 끝났고, 놀라서 뒤로 자빠진 유엔은 눈 을 끄게 뜨고 전쟁에 패한 아랍인들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유엔 특별총회가 열리 고 유엔 평화사절단이 급파되었다. 도대 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이번 장에서는 벤 구리온 수상의 독립선언과 함께 일어난 1 차 중동전쟁, 즉 독립전쟁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다루고자 한다.

벤구리온의 도박, 그러나 완벽한 성공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의 로스차일 드 거리에 있는 미술관에서 국민평의회 의 장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히브리어로 이스 라엘의 독립선언서를 천천히 낭독했다. 그 리고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얼싸안고 애국 가인 ‘하티크바 ’(희망)를 불렀다. 이들은 밤이 늦도록 텔아비브 최고 번화가인 디젠 고프 거리에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새로 운 국가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기 쁨은 거기까지였다. 이튿날 이스라엘의 독 립을 인정하지 않는 아랍 연합군의 대공세 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술이 덜 깬 몸을 이 끌고 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이후에 벌어지 는 독립전쟁은 역사 소설에서 찾을 수 있 는 음모와 행운, 그리고 모든 극적인 요소 들을 다 짜깁기라도 한 듯 흥미진진하게 펼 쳐진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은 65만 명,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랍국가의 인구는 적게 잡아도 1억 4000만 명이나 되었다. 영국인 장군 존 바고트에 의해 훈련된 아랍 최고 정예부대인 요르단 군 10000명을 포 함해 이집트, 이라크, 사우디, 시리아, 레바 논이 동원한 아랍 정규군과 싸워야 하는 이 스라엘은 주로 민간인 출신의 사병들이 주 류를 이루었다. 최신 무기로 무장된 아랍군 과 달리 유대 군인들은 부족한 무기로 인 해 총 한 자루를 돌려쓰면서 싸워야 했다.

이런 류의 전쟁을 관람하는 제3자는 ‘어 느 편이 이기느냐 ’ 보다 ‘전쟁이 얼마나 빨 리 끝나느냐 ’에 더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실제로 아랍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존 글럽 파샤는 첫 공개 문서를 통해 ‘1주일 내에 전쟁은 끝날 것이고 모든 유대인들은 지중해에 몰살될 것 ’이라고 발표했다. 그 리고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옳 은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살상되고 전선이 휘청거려 5월 20일 예루살렘과 서안지역 전체가 요르단 군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1920년대에 불기 시 작한 아랍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하는 실수 를 했듯이, 이번에는 아랍인들이 유대인들 의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 다. 1주일이면 끝난다는 전쟁은 한 달이나 지속되고 아랍측은 ‘고맙게도 ’ 6월 11일 폴케 베르나도트 공이 제안한 한 달간의 무 조건 휴전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양 측은 종전(終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휴 전기간은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었다. 폴케 공은 휴전 기간 동안 어 느 쪽도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 기 금수조치를 발표했지만 어느 쪽도 이를 지킬 의향이 없었다.

2차 대전의 끔직한 전운이 기억 속에 생 생한 서유럽은 자칫 전쟁에 개입하다가 3 차 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해 모든 무 기 판매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했다. 하지 만 2차 대전으로 새롭게 부상한 미국과 소 련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전세가 역전 되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체코슬로 바키아에 압력을 넣어 최신 무기를 이스 라엘 측에 판매했다. 주로 밤중에 전개되 어 ‘검은 작전 ’으로 불린 무기 공수작전은 영국과 미국 공군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유대인들의 은밀한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양측은 초조하게 상대방이 먼저 휴전을 깨 기를 기다렸다.

이집트가 공식적인 휴전 약속 기간을 깨고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한 달간 지속된 1라운드와 달리 2라운드는 불과 10일만에 끝났고 아랍측이 먼저 휴전 요청을 해왔다. 두 번째 휴전도 깨지고 유대인들은 최후의 결전을 원했고 아랍측은 두 번의 참패가 우연이라 확신하고 마지막 ‘삼세번 ’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했다.

최후의 결전에서 유대인들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수도 카이로로 향했고 영국은 이스라엘이 철수하지 않으면 영국이 개입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전쟁은 마무리된다. 이듬해인 1949년 이집트(2월 24일)를 시작으로 레바논(3월 23일), 요르단(4월 3일), 시리아(7월 20일)와 개별적인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은 끝났고, 이 때 맺은 휴전선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국경이 된다.

1947년 유엔이 할당해 준 이스라엘의 영토는 팔레스타인 땅의 56%였지만 전쟁이끝난 후에는 80%까지 확장되었다. 나머지 20%는 이집트가 차지한 ‘가자 지구 ’와 요르단이 차지한 ‘서안지구 ’였다. 독립 선언직전 아랍과 이스라엘의 판세에 대해 ‘아무리 높게 잡아도 승리 확률은 50%를 넘지 못한다 ’는 보고를 받은 벤구리온 수상은 독립 선언을 강행함으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도박에 가까운 결정은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류모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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