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13,002 | 2009-12-31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이론적으로는 은혜를 받아들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은혜를 부인한다. 우리는 “결국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고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부정한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집에서 살지 못하고 두려움의 집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은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대신에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랑받기 원하는가? 사랑받도록 행동하라.” “긍휼을 얻기 원하는가? 긍휼 얻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라.” “남들에게 대접으로 보상받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대접해야하지 않겠는가?”

종종 나는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자기계발 영성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성경은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대신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마치 어떤 기술을 쌓는 것처럼 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양한 영적 훈련들이 근육질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낼 거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영적 훈련들을 소화하기 위해 애쓴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의무들을 처리하면서 세월을 허송하게 된다. 그러면서 속으로 ‘예수님이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시는 거야. 성령께 맡기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점점 우리의 삶은 기쁨이 없는 공허한 삶으로 변해간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소란을 피운다. 그분의 환심을 사서 총애를 얻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쩨쩨함을 숨기고 죄의식에 젖어 살면서 또 한편으로 자신을 고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넌더리 나는 일이고 은혜의 복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한 자들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는 일벌백계의 공의롭기만 한 하나님이시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좋은 소식’(good news)이라 불릴 수 있는가? 정말로 예수님은 그 무서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오셔야 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좋은 소식(복음)’이라 불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오직 한 가지 태도로 일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들어본 많은 신들 중에서 죄인들을 사랑하는 신은 하나님뿐이시다. 거짓 신들, 즉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들은 죄인들을 경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물론 이 진리가 너무나 놀라워서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종교개혁의 중심 교훈은 확고히 서 있다. 이것이 좋은 소식, 즉 은혜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브레넌 매닝 | 규장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24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갈라디아서 2장21절


하나님, 제게 이 귀한 좋은 소식, 은혜의 복음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노력하고 애써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저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을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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