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17,925 | 2011-12-29

‘왜 나는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

나는 사사기 6장을 묵상하다가 매우 흥미로운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이에’라는 단어이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_삿 6:6

사사기 6장 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구절의 내용은 도저히 연결이 안 된다.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것과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겠는가? 그런데 완전히 다른 성질의 이 두 명제를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에’라는 단어이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는 많은 경우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고 만다. 많은 사람에게 고통이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고통으로만 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우리 가운데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며느리는 시댁 식구들의 구박으로 인해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그 영혼이 맑아지겠는가, 아니면 인생이 황폐해지고 그 영혼이 피폐해지겠는가? 아마도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고통 그 자체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과 고난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고통은 고통일 뿐, 고통 자체에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고통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벽을 깨고 ‘이에’를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고난이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고난의 벽을 깨는 영적인 망치가 바로 ‘이에’이다. ‘이에’를 잡을 때에야 비로소 고통이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요,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유익이 될 수 있다.

다윗이 사울 때문에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하다가 ‘이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대로 사울에게 복수의 칼을 휘둘렀다면, 다윗의 고난은 그저 고난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고통당했을 때 ‘이에’를 붙잡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다.

우리가 찬바람 맞으며 새벽예배에 참석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피곤을 무릅쓰고 철야기도회에 참석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이에’라는 망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과 느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말씀 안에서 “나는 왜 이 악순환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가?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그 부요를 우리에게 나누어주기 원하시는데 왜 나는 여전히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를 냉철한 머리로 깨달아 돌이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항변하는 신앙이 아니라 ‘이에’라는 망치를 들고 고난의 벽을 깨뜨리는 신앙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진정한 부요가 우리 삶에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일어나라이찬수 | 규장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누가복음 15장16~18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 예레미야 29장12,13절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고 마는 현실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현실의 문제와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겠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러셨던 것처럼 저 또한 의의 길을 사모하며 인내하겠습니다. 진정 풍요로운 인생을 경험하게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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