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257 | 2014-03-05

초대 교회의 분열

1세기 당시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교회는 유대법의 준수와 예배의 형식,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분파 (schism)’라는 용어를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의 비잔틴-그리스정교회 사이의 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에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분리되어 나왔으며, 교파의 분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1세기 당시 교회에서도 헬라 단어의 분파를 의미하는 분열이 있었던 사실은 잘 모른다.

(헬라 사상과 언어, 철학을 지지했던)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과부들이 음식을 분배 받는 매일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에 대해 (랍비들의 가르침을 따랐던) 히브리파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불평했다는 표현은 실제 보다 더 온화하게 묘사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행6:1). 이 일로 인해 열 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 명”을 택했고,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맡겼다. 이들 7명은 비록 태생은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이름을 지닌 헬라 사람들이었고,열 두 사도들은 히브리어 이름을 지닌 참 히브리 사람이었다.

이들 일곱 명이 이끈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회당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유대법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았던 그리스 디아스포라 (동남부 유럽과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 출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일곱 명 중 하나였던 스데반을 “모세를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며 고소하고, 돌로 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결과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으로 갔고, 그곳에서그들은 바울과 함께 이교도 나라들을 향해 전도 활동을 나갔다.

한편 베드로와 야고보 중심의 열두 사도 지도 아래 있었던 초기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적응 지도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서 만났고, 유대인들에게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행2:46-47).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긴박한 재림은 가장 중요한 초점이었다. 외경에 있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메시아는 시온산에서 등장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예루살렘에 머물렀다(4 에스라 13:35). 후에 이것은 신약에서도 확인되었다(계14:1-3).

반면 초기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긴박한 재림은 예식과 신비주의, 삼위 일체 교리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헬라파 기독교인들과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이러한 분열이 종결되었을 때 - 그러한 분열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이었다 - 복음은 비유대인들에게 ‘비유대화’ 방식으로 주어졌고, 히브리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후 66년, 임박한 멸망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가 있은 후 로마에 반역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고자 했던 예루살렘의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펠라라고 불리던 요단강 동쪽도시로 도피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135년의 유대인의 바르 코크바 반란에 대한 로마의 승리 이후, 모든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진입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죽임을 당했다. 이는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네게브 사막으로 내려갔다. 4세기 교부였던 제롬은 이 공동체의 남은 자들을 조롱했고, 이방 교회는 이들의 모든 흔적이 기독교에서 사라질 때까지 핍박했다. 하지만 시온주의의 시작과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과 함께 메시아닉 유대인들 또한 자신들의 신앙의 기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Picture - 대분열: 교회 역사는 심각한 분열로 약화되었다 (The great s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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