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1,932 | 2014-03-05

험난했던 베긴 정권 시대

1977-1983년

1979년 이집트와 협정을 맺으면서 ‘평화를 위해 땅’이라는 개념에 동의한 이후, 강경파인 리쿠드 당의 수상이었던 메나헴 베긴은 1967년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유를 강화시키려 했다. 베긴은 시내 반도를 이집트에 되돌려 주는 것에 동의 했지만, 1980년 7월 30일 국회는 ‘예루살렘 법’을 통과시켰고, “완전히 통합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1967년 전쟁 이후 구도시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합병을 공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합병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1967년 11월에 통과된 유엔의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문 242 조항은 이스라엘이 6일 전쟁 동안 점령한 영토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980년에 유엔 결의문 478 조항은 예루살렘 법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강경파인 베긴은 단념하지 않았고, 1981년에 이스라엘은 1967년에 점령한 전략적 요충지인 골란 고원을 합병했다.

베긴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골란 고원에 대한 성경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국회도 그 견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의 정부는 성경의 중심 무대인 유대와 사마리아를 합병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시민권자가 되면 인구 통계적으로 유대 국가의 특성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81년 6월 베긴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오시라크 원자로에 공습을 감행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 최초의 우주비행사이자, 2003년 콜롬비아 우주선의 비극적인 폭발 사고 때 죽은 일란 라몬이 조종사로 이 공격에 참가 했었다. 베긴의 이러한 결정은 종종 베냐민 네탄야후의 망설임과 비교된다. 그는 이란의 핵프로그램에 대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언젠가는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만 하고 있다.

제 1차 레바논 전쟁이 1982년 6월에 일어났다. 남부 레바논에 본부를 둔 야세르 아라파트의 PLO 군대가 북부 이스라엘에 카튜사 로켓 공격에 대한 대응이었다. 주 런던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곱에게 부상을 입혔던 PLO의 암살 시도가 결정타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입했지만, 전쟁은 로켓 공격을 중지시키겠다는 원래 목표에서 한참 벗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베이루트에 있던 PLO 본부까지 진격했고, 아라파트와 그의 군대는 레바논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갈릴리를 위한 평화 작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전쟁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1982년 9월 휴전까지 약 700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의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 전쟁은 우익 정권하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쟁이었고, 좌익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반대로 우익 진영은 역사적으로 좌익 정부 아래서 치뤄졌던 전쟁들을 지지했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1967년 전쟁과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동안 존경 받던 야전 사령관이자 전쟁 영웅인 아리엘 샤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이루트 근처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서 일어난 기독교 민병대의 팔레스타인 시민 학살에 관한 청문회 후에 사임을 해야 했다. 카한 위원회는 민병대가 이들 난민촌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실패한 책임이 샤론에게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스라엘은 1985년에 남부 레바논에 안전 지대를 설정했고, 자국 군대 및 대부분 기독교 민병대로 이루어진 남부 레바논 동맹군 (SLA)이 순찰을 했다. 이스라엘은 2000년 여름, 레바논에서 모든 자국 군대를 철수 시켰다.

레바논에서 많은 이스라엘 생명들을 잃은 것은 베긴에게 힘든 시련이 되었고, 1982년 말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알리자의 죽음으로 괴로움은 가중되었다. 결국, 그는 1983년 10월 총리직을 사임했다.

Picture 1981년 폭격 맞은 이라크의 원자로

승리의 사인: 베이루트에서 아라파트

레바논 전쟁: 1982년 아리엘 샤론

시가전: 이스라엘 군대가 1982년 레바논에서 PLO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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