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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시대, 제3 밀레니엄의 진정한 기원의 해 2001년이 저물어간다. 올해의 기억은 9.11 미국 테러사건의 충격으로 인하여 ‘종말’을 온몸으로 느낀 해였다고 생각한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종말론 교과서’처럼 인류에게 불안과 공포를 선사했었다. 그리고 아프간에 대한 보복전쟁과 포성 속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러한 때 성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베들레헴 예수탄생 교회 심장부에 한 황금빛 금속문양이 빛을 발하고 있다. 대리석 위에 빛을 발하고 있는 문양은 수많은 순례자들의 손길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신이 인간이 되시다.” 왜 주님은 육신이 되셔야했는가.

올해 교회절기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그 강도가 사뭇 줄어들어 보였다. 부활절 때는 불교의 초파일을 기다리는 연등행사와 겹쳐서 거리마다 온통 연등행렬이 나부꼈다. 기독교인인 우리 자신들도 거리에 나서면 부활절보다는 초파일을 생각할 정도로 연등이 거리에 만연했었다. 그런데 첫 번째 대강절에는 또 어땠는가. 월드컵 조추첨 행사로 인해 나라가 온통 월드컵 함성에 떠들썩했다. 대강절의 고요와 묵상이 그만 “코리아 파이팅!”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기독교 전통이 오래된 유럽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대강절은 교회절기 중에서 조용한 절기에 속한다. 고난절처럼 비탄과 애통의 고요는 아니지만 경건과 침묵으로 하나님의 신비하고 광대하신 “작업”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는 엄숙한 성육신의 절기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뿐이로소이다”고 조용해지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개인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대강절의 출발은 고요해야 한다. 주의 강림과 같이.

교회가 그렇게 대강절을 맞을 즈음, 다른 곳에서는 떠들썩하니 대강절을 맞는 곳이 있다. 백화점이 대표적이다. 쇼윈도우에 솜으로 만든 눈송이가 걸리고, 형형색색 종이별 사이로 화려한 불빛이 번쩍인다. 사원들은 디스플레이에 신경 쓰고, 영업부 사원의 계산기에서는 올해 연말연시 판매실적이 부리나케 두드려진다. 홍보부는 산타할아버지를 화장시켜 거리로 내모는데, 아이구야, 그들은 미끈한 다리를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산타아가씨 아니던가.
대강절 왜곡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버튼 하나에 사람들 물결 사이로 강하고 빠른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원래가 트롯트이던지, R&B던지 상관않고 숨쉴 틈 주지 않는 속도의 음악으로 돌변한다. 백화점 안팎의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몸을 흔든다. 오, 음악이 선사하는 거대한 일체감, 그러나 본질은 상혼(商魂)으로 점령당한 거대한 시장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말이 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구매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대망의 밀레니엄 원년의 대강절은 어느덧 물신(物神)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다. 백화점은 이미 백화(百貨)점이 아니다. 그것은 천화(千貨)점, 만화(萬貨)점이다. 온갖 물건이 진열되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나를 사세요, 나를 사세요. 나를 소유한다면 당신은 행복해질 거예요.” 자본주의의 끝에 와 있는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충분하다. 영혼을 채워줄 그 무엇이 갈급한 것이다.

런데 락의 고음 사이로, 힙합의 연결음 사이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아주 미세한 음성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거리에 나왔느냐. 너희가 무엇을 찾으려고 백화점에 나왔느냐.”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 그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그 무엇을 찾아 거리로 나온 것이다. 내면의 충동에 이기지 못해 거리로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백화점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물신이 무엇을 채워줄 수 있단 말인가. 어깨를 마구 부딪치는 무례한 보행자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도시의 초라한 구석으로 가야한다. 거리의 소요와 유혹의 물신들을 떠나 침묵으로 내려가야 한다. 자랑스런 충동구매를 뒤로 하고, 의미 없는 악수와 포옹을 떨쳐버리고, 탐욕의 부킹을 내던지고, 고요한 틈새로 가야한다. 백화점 장식보다 몇 백 배, 몇 천배 허술해 보이는 어느 작은 개척교회의 대강절 장식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내려가야 한다. 강림의 신비는 그렇게 요란하게 떠들지 않았다. 주님은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게, 아주 미련하게”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미련곰퉁이 같은 방법 속에 성육신의 진리는 빛나고 있으니. 가난함 속에 품으신 부요, 가난함 속에 감추어진 영원한 부요, 대강절의 시작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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